우울하고 강박적인 사람들이라면 테니스 한번?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끈이론>"

끈이론



10여 년 전, 테니스 라켓을 처음 잡았다. 신세계였다. 내가 왜 이걸  여태 배우지 않았을까 후회도 됐다. 운동 신경이 나쁘지는 않은 편이라서 포핸드, 백핸드, 발리 등등 금세 익혔다. 30도가 넘는 여름에도,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는 겨울에도 레슨 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실내 코트가 많지 않아서 한 겨울에도  실외에서 테니스를 배웠다. 몹시 추운 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레슨을 빠지는데, 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보다 못한  코치가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면 공이 제대로 튕기지 않으니까 나오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가니까 코치가 헛웃음을 웃었지.

그렇게 2년쯤 배우니까 제법 상대와 랠리도 되고, 같은 코트에서 레슨 받던 어르신들이 게임에도 끼워주더라(우리나라 테니스 코트에는 젊은이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 더 많다). 그 무렵에 다니던 회사가 쫄딱 망했다. 몇 년 치 퇴직금은 물론 몇 개월이나 밀린 월급까지 받지 못했다. 그것만 해도 몇 천만 원..... 휴.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월급 밀릴 때 생활하느라 적금도 깨버린 상태였고, 설상가상 빚까지 있었다. 한 번에 해결해주겠다던 사장 말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그때 내 직업은 카피라이터. 그전에 다니던 회사도 망해서 이직했던 참인데, 또 망한 것이다. 같은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요즘 승승장구하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말하기>의 김하나 씨도 있는데,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내가 카피라이터로 재직했던 회사는 지금도 건재한 첫 번째 회사 빼고는 다 망했다. 놀기 좋아한 나 때문인가? -_-?

아무튼 그렇게 거리로 나앉.....지는 않았고, 못 받은 돈에 빚까지 졌던 나는 실업급여를 받아서도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갔다. 회사 다닐 때는 퇴근 후 한 시간쯤 레슨을 받거나, 가끔 주말에 테니스를 칠 수 있었는데 백수가 되니 남는 게 시간인지라, 아침 여덟 시부터 코트에 나가 점심때까지 있었다. 오는 사람마다 상대해주며 마치 무림의 고수(?)라도 되는 듯이 랠리를 해주곤 했다. 물론 진짜 고수 앞에서는 깨갱. 주로 초보인 사람들을 상대했는데(코치가 시킴), 남자들은 (초보 주제에도) 좀 비웃는 듯한(?) 태도로 도전했다가 내 공을 받으면서 당황하곤 했다. 코트에 눈이 녹기 시작한 그 봄부터 한낮의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른 여름까지 쭉, 거의 아침 8시부터 점심까지 코트에 있었으니, 그때 내 얼굴과 몸은 농사꾼처럼 시커멨다. 다시 직장을 알아볼 생각도 안 하고 백수 딸이 시커먼 얼굴로 테니스만 치고 다니니 그때 엄마 속은 내 얼굴보다 더 시커멨을 것이다.

사실 내 속은 더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때까지 광고일로 밥 벌어먹고 살아왔지만 그 일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네버,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 화려하지만 속 빈 강정 같은 업계에 신물이 났던 참에 회사가 망했던 것이니 역시 내 탓인가? -_-? 그러다 보니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무작정 테니스만 쳤다. 공을 쫓는 눈, 라켓으로 공을 때릴 때 탕탕 울리는 그 상쾌한 소리. 공을 따라다니느라 땀에 흠뻑 젖어서 모든 걸 잊을 수밖에 없던 그때- 그렇게 몇 시간을 내리 테니스만 치다가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 코트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바라본 한낮의 평온한 하늘은 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다 돌아간 뒤는 아니었다. 그때 그 벤치에 늘 함께 앉아 있던 사람이 애인이 되어서 지금도 여전히 곁에 있다...... 음, 테니스가 선물한 내게 가장 고마운 것 중 하나랄까. 백수라 시간이 남으니 그즈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절대 방영해주지 않는 온갖 테니스 중계도 인터넷으로 새벽 내내 찾아보곤 했다. 밤에는 테니스를 보고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테니스를 하고. 그게 그 시절 내 일과였다. 어느 날은 코치가 “잠자냥 씨는 테니스에 미친 사람 같아”라고 했지.

테니스는 그때 내 마음속 절망을 잊게 해 준 존재였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게 보내고, 그 후 나는 하루에 몇 시간씩 테니스 코트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밥벌이를 다시 하는 행운도 찾아왔다. 이것도 테니스 덕분일까? 가끔은 그때 한낮의 빈 코트에서 애인과 함께 나란히 앉아 보던 하늘이 그립기도 하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끈이론>을 읽는 내내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 또한 테니스에 미친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그는 친구와 함께  미치광이처럼 테니스에 몰두했던 시기를 이렇게 말한다. ‘아스팔트에서 최면에 걸린 듯 행군하는 둔주 상태, 밋밋하면서도 무성하고  멍하면서도 격렬하게 느껴지는 정신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젊었고 언제 그만둬야 할지 알지 못했다. 몸뚱이가 지긋지긋해서  다치게, 닳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52쪽)라고. 나 또한 어쩌면 그 시절에 그런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심해서  몸뚱이를 다치게 하고 싶은 그런 상태.


테니스는 가만있지 않는 공을  가지고 하는 당구요, 생각할 시간이 없는 체스다. 미식축구를 보병과 소모전에 비유한다면 테니스는 포병과 공습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끈이론>, 30쪽)


이 책은 ‘끈이론’이라는 제목보다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라는 부제가 더 매력적이다. ‘끈이론’이라는 제목은 뭐랄까 내가 미치도록 싫어하는 수학이나 과학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테니스에 수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각도까지 헤아리면서 샷을 날린 모양인데, 사실 난 그런 거 절대 모르고 동물적 감각으로 공을 두들겼을 뿐이다.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약간 강박적인 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저 백수 시절 얼마나 우울했던가! 백수라서가 아니라,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음울한 어린(?) 양은 테니스에서 빛을 찾았다. 더욱이 테니스는 스포츠이면서도 상대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어서 더 좋았다. 프로 테니스 선수들은 경기 중 코트를 바꿀 때에도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경기 시작 전, 후로 나누는 포옹과 악수 정도가  전부랄까. 타고나기를 무리 지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스포츠의 거리두기는 정말 완벽에 가깝게 취향에 맞았다. 물론 이 좁은 땅에서 테니스를 즐기는 아마추어로서는 게임이라도 할라치면 대부분 복식경기를 하자고 주장해서 ‘고독한’ 경기를 지향하는  나를 진저리 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와 애인은 오직 둘이서만 테니스를 친다. 동호회에 들어오라는 말도, 같이 복식을 치자는  낯 모르는 이들의 제안도 모두 거절한다. 코트에는 저 너머 애인과 나 둘 뿐이다. 서로 상대를 너무 잘 알아서 우리 실력은 더  늘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둘이서만 칠 것 같다.

아무튼 테니스는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임에 틀림없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을 보라. 그는 서브를 넣을 때 항상 하는 강박적인 버릇이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말을 한껏 순화해서 서브 넣기 전 나달이 엉덩이를 ‘꼬집는다’고 표현했는데, 꼬집는 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나달의 경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그는 똥꼬가 팬티를 먹은 것처럼 서브를 넣기 전에 늘 똥꼬에서 팬티를 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똥꼬 언저리를 오간 그 손가락을 이용해 귀 뒤로 (이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정성껏 넘기고 상대를 쏘아보다가 서브를 날린다. 나달은 또 본인이 마시는 물병 세 개를 딱 나란히 정렬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물론 이런 강박증은 그 완벽해 보이는 페더러에게도 있다. 다만 페더러는 나달처럼 볼썽사납거나 확연히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조용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파란 끈으로 묶은 라켓을 몇 번째에는 꼭 바꾸는 등등 그만의 강박이 있다.


단언컨대 테니스는 스포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가장 힘겹다. 테니스는 신체 통제, 손과 눈의 협응, 재빠름, 최고의 속도,  지구력, 그리고 조심과 (우리가 용기라고 부르는) 놓아버림의 기묘한 조합을 필요로 한다. 두뇌도 필요하다. 수준 높은 경기의 한  포인트에서의 한 번의 공방에서의 단 하나의 샷은 역학적 변수의 관점에서 악몽과 같다. 네트의 (가운데) 높이가 91.4센티미터이고 두 선수의 위치가 (비현실적이게도) 고정되었다고 가정하면 샷 하나의 위력을 결정하는 것은 각도, 깊이, 속도, 스핀이다. 이  요인들은 각각 또 다른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끈이론>, 117쪽)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테니스는 스포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가장 힘겹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테니스는 정말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무척 힘들다. 내가 이런저런 운동을 하면서 몸을 다친 적은 거의 없는데, 테니스 때문에 다리에 깁스를 두 번이나 했다.  왼쪽,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찢어져서 저마다 한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근육이 찢어질 때의 그 고통은................. 음. 종아리를 누가 총알로 쏘는(실제로 딱! 하는 소리가 들린다. 으으) 듯하다. 아무  그럼에도 테니스를 포기하지 못하니, 확실히 이 스포츠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테니스는  일종의 기예라고 말한다. 진짜 최상급 선수들은 우리 앞에서 기예를 펼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예를 펼치는 선수들을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얼마나 잘 묘사하는지, 그 적절한 비유에 배꼽이 빠질 만큼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그는 안드레 애거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이렇게 말한다. ‘애거시는 깡말랐고 계집애처럼 생겼으며 밀어버린 머리와 베레모스러운 모자와 검은 신발과 양말과 듬성듬성한 염소수염 덕분에 소년원에서 갓 출소한 사람 같다’(141쪽). 마이클 창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얼기설기 꿰맨 모습’이라고 하며, ‘머리통은 버섯 모양이고 머리카락은 칠흑 같으며 표정에는 심각한 난치성 불행이 묻어난다.’고 말한다. ‘대학원 글쓰기 강좌를 제외하면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얼굴’이라나. 테니스 역사상 미남으로 따지면 상위권에 들고도 남을 선수인 마크 필리포시스를 스파르타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피트 샘프러스와 경기하는 그를 ‘크고 느린 기계와 같은 베이스라이너로 눈에는 싸늘한 적의가 감돈다’고 표현한다. 그에 비해 샘프러스는 ‘허약하고 지적이고 (슬기롭고 슬픈) 시인처럼 보이며 민주주의만이 그렇게 지칠 수 있는 듯한 방식으로 지쳐 보인다’(158쪽)고 말하는데,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 너무 웃겨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2008년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의 테니스계는 지켜보지 못했는데, 그 후로 크게 활약한 노박 조코비치나 앤디 머레이 같은 선수들을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완벽한 비유를 하고도 남았으리라.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살과 빛의 몸을 입은 페더러’라는 글만 봐도 그가 얼마나 테니스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과  특징을 잘 알고 있는지, 또 그리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페더러를 좋아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를 거의 숭배하는 관점에서 묘사한다(그런데 테니스를 즐겨 보는 이가 페더러를 숭배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그는 ‘아름다움은 경기 스포츠의 목표가 아니지만 높은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최상의 분야’(194쪽)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최상급 운동선수의 아름다움을 직접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환기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줄곧 페더러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페더러의 포핸드는 거대한 액체 채찍이요, 백핸드는 한 손으로도 플랫 드라이브를 날리거나 톱스핀을 먹이거나 슬라이스를 깎을 수 있다.’(200쪽) ‘페더러는 나이키에서 올해(2006년) 윔블던에서 입도록 한 버터밀크 색 스포츠 코트 차림이다. 페더러는 어쩌면 오직 그만이 스포츠코트를 반바지와 운동화에 받쳐 입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다.’(198쪽), ‘고전적 스토아주의와 강한 정신력과 훌륭한 스포츠맨 정신과 어디  하나 흠잡을 때 없는 품위와 신중함과 아낌없는 자선’ 등등의 아낌없는 찬사에 이어 페더러의 경기를 보면 ‘지독하게도 종교에 가까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겪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까지 찬양한다. 이 모든 주장에 104% 동의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내내 감동으로 복받쳐 올랐다. 





2006 윔블던


 2006년 윔블던 결승 이후. 보라, 페더러는 운동화에 반바지에 버터밀크 색 스포츠 코트를 입어도 이토록 아름답다!


페더러는 천재, 돌연변이, 화신이라고 불릴 만한 유형이다. 그는 서두르거나 균형을 잃는 법이 없다. 그에게 날아오는 공은 실제로 그래야 하는 것보다 몇 분의 1초 오래 머물러 있다. 그의 동작은 운동의 동작보다는 무용의 동작에 가깝다. 페더러는 살과 빛의 몸을 입은  존재다. (<끈이론>, 208쪽)


‘살과 빛의 몸을 입은 페더러’는 2006년, 그러니까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쓰인 글이다. 그의 또 다른 에세이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도 실려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페더러는 스물다섯  나이로 현재 살아 있는 테니스 선수 중에서 최고다. 영영 최고일지도 모르겠다.’(193쪽) 말하는데,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21년인 지금도 페더러는 최고다. 물론 이 최고가 1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현재 페더는 랭킹 5위이다(2020년 11월 기준). 그런데 그는 1981년 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마흔이 넘었다! 그 나이에 여전히 톱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그는 정말이지 살과 빛의 몸을 입은 존재이자, 천재이자, 영영 최고의 테니스 선수일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살아있었다면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페더러의 경기를 보면서 종교적인 고양까지 느끼며 행복해했을 텐데……. 같은 페더러 팬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난해는 코로나로 인해 몇몇 메이저 대회가 무관중 경기로 열린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투어 경기가 취소되었다. 게다가 페더러는 부상으로 하반기 이후 경기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올해 2월, 뒤늦게 호주오픈이 시작되었지만 페더러는 불참했다. 그러나 곧 복귀 의사를 밝혔다. 페더러가 더 나이 들기 전에 그 우아한 경기를 보기 위해서라도 코로나가 어서 끝나야 할 텐데……. <끈이론>은 테니스와 관련해서는 가장 우아한 에세이임에 틀림없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처럼 말이다.


잠자냥님의 브런치의 글을 스포츠콕이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잠자냥

당신 영혼에 내리는 1cm의 눈, 책이라는 눈- 책을 만들며 늘 책을 읽고 있습니다.